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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해방 운동-1세대 페미니스트의 한계]

제1세대 페미니스트는 모두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림케 자매, 루시 스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루크레샤 모트, 수전 앤서니 등이다.(미국 여성사의 쥬요 저작인 엘리노어 플렉스너의 "투쟁 백년사"는 노예제 반대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여성들이 처음으로 조직화하는 것을 배우고, 공공 집회를 여는 것을 배우고, 청원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배운 것은 바로 노예제 폐지 운동에서였다. 여성들은 노예 폐지론자의 자격으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말할 권리를 얻었고, 이를 통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기본권에 대한 철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4반세기 동안 노예해방 운동과 여성해방 운동이라는 두 운동은 서로를 증진시키고 강화시켜 왔다.)

선거권이라는 문제는 반대 여론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의식과 노력이 동원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여성참정권이라는 쟁점이 얼마나 핵심적이며 증대했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성참정권은 많은 면에서 성 혁명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에너지를 헛되이 낭비한 원인이기도 했다. 여성참정권에 대한 반대는 몹시 견고하고 확고부동했고, 이 때문에 투쟁 또한 길고도 쓰라렸다. 덕분에 그것은 지나치게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마침내 참정권을 쟁취했을 때 페미니즘 운동은 극도의 피로에 지쳐 와해되고 말았다. 여성참정권 운동은 마치 긴 여행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타이어가 터져 버린 것을 발견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차라리 여행을 포기해야 할 만큼, 수리하는 데 시간과 노동,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상태였던 것이다. 

참정권 문제에만 집중했던 것은 여성운동의 중대한 결점이었으며, 그 때문에 여성운동 자체가 소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투표권을 얻은 후 여성운동이 설 자리까지 잃게 되었다. 이는 여성운동이 성적 지위와 기질, 역할을 조건화하는 과정을 타파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지점까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정권 쟁취는 사법 개혁이 보여 주듯 피상적 변화만을 가져왔을 뿐이며, 여성운동은 목적을 성취한 후에도 그 성과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여성이 결혼에서 새로운 법적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이혼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었음에도, 결혼 자체는 여전히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후 뒤따른 반동의 시기에도 "가정"은 여전히 반짝이는 색깔로 치장되었을 뿐이다.

[자댕문학비평-러스킨, 밀]

게다가 러스킨의 목적은 희망찬 수사로 종속체계를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밀은 그 체계를 폭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 남자 아이들이 얼마나 일찍부터 여자 아이보다 원래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되는지를. 키가 자라고 힘이 강해지는 만큼 그 생각도 얼마나 강해지는지를, 학교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그런 생각을 어떻게 주입시키는지를, 얼마나 일찍부터 남자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도 전혀 없이 자신이 어머니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지를(아마도 이는 어머니의 인내심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평생 반려자로 삼은 여성에게 얼마나 교만하게 군림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이자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남자의 인생 전체를 심각하게 그르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 무엇보다도, 여성 전체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이 여성들 중 한 사람에게 개인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과 결합된다면, 그리고 양심적이고 애정 어린 인내심을 가르치는 학교가 양심과 애정이라는 강인한 성격적 측면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내는 데 반해, 교만과 거드름을 훈련시키는 정규교육 학교는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자들을 만들어 내는 상황이라면....... . (밀)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이기적 성향, 자기 숭배, 이치에 맞지 않는 자기 선호 등은 현재 남녀 관계의 구성에 원천이 있고, 그것에 뿌리박고 있으며, 주요한 자양분을 그것으로부터 추출한다." (밀)

"전제정치의 미덕뿐만 아니라 악덕까지 조장하고 있는 전제정치의 학교"(밀)에 불과한 현 상황에서, 가족은 구성원들의 총체적 평등에 기초하지 않는 한 결코 구성원에게 진정한 사랑을 제공할 수 없다.

사회적 책임감이 여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러스킨의 빅토리아시대 특유의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스꽝스럽다. 첫째, 법적.경제적 면에서 소유권을 박탈당한 여성이 또 다른 소유권을 박탈당한 집단에게 실질적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둘째, 그러한 책략은 남성들, 특히 지배계급의 남성들에게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빈곤층에 대한 책임감을 무시할 수 있게 하거나, 여성에게 대신 책임감을 떠넘길 수 있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억압을 종식시키는 것보다는, 위안을 주는 자선으로 억압을 완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낫다고들 이야기한다. 정신이 올바로 박힌 여성이라면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칭찬이다. 자연스럽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기존 질서 어디에서도,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법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황된 이야기가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권력이라는 것이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남성들이 인정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 예속 상태가 실제로 야만적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속 상태는 (노예와 주인 양쪽을 다 타락시키기는 하지만) 그래도 노예보다는 주인을 더 타락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밀)

현재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여성이, 더구나 그에 만족하고 있는 여성이, 어떻게 자립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밀)

여성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월한 사람이 내려 주는 축복이다. 여성은 자기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밀)

[여성의 섹슈얼리티]

그리스 비극 작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종교적으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아이스킬로스는,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에우메니데스"를 통해 가부장적이고 부권적인 권위가 그보다 앞선 질서를 옹호하는 목소리와 대결하게 되는 드라마를 보여 준다. 후자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주장을 강조하며, 바흐오펜이 보기에는 가모장적인 목소리다. 자신보다 앞선 신화를 소재로 작업했던 아이스킬로스는 클리템네스트라와 분노한 여신들의 주장과, 이에 대립하는 아가멤논과 오레스테스의 주장 사이에서 올림포스 신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는지를 예리하게 보여 준다. 여기에서 양쪽의 주장은 거의 이데올로기적 충돌과도 유사한 것이 된다.

오늘날 훌륭한 과학적 증거는 모두 여성이 생물학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능력을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성교의 빈도에 있어서나, 성교 중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빈도에 있어서나 모두 그러하다. 

게다가 생물학적 능력이 심리적 필요성이 되지는 않으며, 심리적 만족과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이 어떠하든, 인간으로서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여성은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섹슈얼리티 또한 사회적 힘에 종속되어 있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라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진 기능은 철저하게 변형되었고 그 진정한 성격 또한 오랫동안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는 문화가 생리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는 놀랄 만한 증거다.

가부장제 신화와 신념은 늘 남성의 성적 능력이 더 크다고 전제하며, 이로부터 성에 대한 이중 잣대와 심지어 일부다처제까지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생물학적 진실과 완전히 반대된다고 하더라도, 남성에게는 편리한 가정이다.

[가족의 기원]

원래 일부일처제에 속하는 것은 여성뿐이다. 남성은 "오늘날까지도 군혼의 쾌락을 버리려고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엥겔스) 전통적으로 성에 대한 이중 잣대를 통해 일부다처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매춘이라는 주제는 기사도적 얼버무림으로 대강 넘어가곤 하는 주제였으며, 오늘날에도 성적 자유를 성적 착취와 생각 없이 동일시함으로써 혼동되는 주제다. 엥겔스가 보여 주듯, 매춘은 전통적인 일부일처제 결혼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이러한 주장은 수많은 증거로 뒷받침될 수 있다.

가부장제 가족의 이상적 형태이자 오늘날 가족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로마의 가족이다. 로마의 가족에서 서구의 '가족'이라는 말이 나왔을 뿐 아니라 그 법적 형태와 선례 또한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기분 좋게 말하듯, 원래 '가족familia'이라는 말은,
>오늘날 속물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감상주의와 가정불화가 혼합된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에게 처음 이 말은 부부나 그 자녀에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노예에게만 적용되었다. '파물루스Famulus'라는 말은 가내 노예를 의미했고, '파밀리아Familia'는 한 사람에게 속하는 노예를 합친 숫자를 의미했다. (...) 로마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조직체를 명명하기 위해 그 말을 만들어 냈는데, 이 조직체의 우두머리인 아버지의 권위하에 아내와 아이들과 일정한 수의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의 법에 따라 그들에 대한 생사 이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엥겔스는 경제적 요소가 모든 성 관계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결혼이 본질적으로 경제적 성격을 가진 부득이한 계약이 되지 않을 때까지 결혼은 계속 매춘의 변종(예를 들어 성을 돈이나 재화에 대한 보상으로 교환하는 형태)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다른 19세기 이론가들을 넘어서고 있다. 그가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추는 매우 흥미롭다. 경제적 동기 때문에 결혼을 하거나 결혼 생활을 견디고 있는 여성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기질이나 이해관계에 불리한 노동 계약을 한 노동자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일부일처제 가족을 옹호했다. 이들이 가장 너그러운 모습을 보인 순간은 몇 가지 사법 개혁을 유감스럽게 인정했을 때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적으로 사법 개혁이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이유인즉슨, 모든 선한 남편은 선한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기사도적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여성 교육이라는 문제 또한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제였다. 장식에 불과한 최소한의 교육만이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교육이며, 이는 남성의 더 높은 학식을 보완해 준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진지한 교육을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부장제 결혼과 가정에 대한 감상주의에 가해지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사회적.심리적) 남성 우월주의에 가해지는 하나의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매춘이라는 현상이나, 당시 많은 여성들이 빠져 있었던 빈곤이라는 곤경에 대해서도, 이러한 자비로운 감상주의는 단지 개탄하는 선에서 그칠 뿐이었다.


[여성문학비평-샬롯 브론테, "빌레트"]


밀에 따르면, 여성 작가들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대부분 남성적 태도와 자아에 영합하다고 한다. 이러한 밀의 경고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심오한 진실이다.
이 네 명의 '천사들'은 도둑처럼 불쾌하고 음울하며, 유령처럼 냉담하고 무미건조했다. 저런 여자들과 살아야 한다면! 불안하고, 유머 감각도 없고, 핏기도 없고, 생각도 없는, 날도된 피조물들! (빌레트-샬롯 브론테)


[남성우월주의]


남성적 문화는 여성을 섹스 심벌이자, 정신이나 개성 없는 살덩이로, "음부cunt"로 바꾸어 놓는다. 그 자신이 바라보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학술원의 대표 인물들이 보여 주는 따분한 경건함과 비굴한 봉사 정신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선동만이 행해질 뿐이다.


성적으로 억압된 오랜 기간을 거쳐 성적 에너지가 결국 배출 수단을 찾고, 그 억눌린 역동성이 출구를 찾게 되면, 신경증, 변태 등의 반사회적 섹슈얼리티의 형태들로 우회하게 된다.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사회조직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질서의 유일한 대안이란 무질서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분석을 보면, "보수주의자가 보기에 사회질서는 여성의 종속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종속을 수반하는 가족 구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가족의 응집력은 일차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의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경제적 평등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위는 정서적 유대 관계보다는 경제적.법적인 실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현대의 핵가족조차도 여타의 인간적 노력을 남성에게 부여하고 여성의 일을 비천한 가사일과 강박적 양육에만 한정시킴으로써, 성 역할에 있어서 전통적인 분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남성 우월주의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치는 처음부터 성 혁명과 페미니즘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세력으로 간주했다. 독일 여성운동은 뒤늦게 시작되었다. 20세기 들어 십 년이 지날 때까지도 독일에서는 여성운동이 시작되지 못했다. 그러나 나치당이 집권하기 5년 전에 페미니즘은 수만 명에 달하는 독일 여성을 조직했고, 네 개로 분리된 거대한 <여성 조직 연합체>를 꾸렸다. 1928년에 여성 연합체가 최초로 조직되자 페미니즘은 견고한 요새가 되었다. 나치는 매우 조직적인 방법으로 페미니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즉 페미니즘을 당파적으로 만들고, 페미니즘에 침투하고, 선거를 강요하고, 지도자 자리를 강탈하고, 페미니즘 지도자들을 페미니즘 운동과 공적 생활 모두에서 숙청하고, 더 나아가 페미니즘 조직을 당의 명령에 따라 <여서오히>, <여성단>, 그리고 나중에는 <여성전선> 등의 나치 단체로 포섭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자댕문학비판-프로이트]


프로이트라는 위대한 선구자의 발견(그의 무의식 이론과 유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론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크게 기여하였다)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는 비극에 가까운 아이러니다. 그리고 여성을 전통적 예속에서 해방시키려는 성 혁명의 목표라ㅏ는 측면에 있어서도, 프로이트의 입장은 강력한 반혁명적 태도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불행히도 통속적 프로이트주의는 프로이트 자신의 의도를 훨씬 넘어섰지만, 그럼에도 프로이트 자신의 저서가 없었다면 통속적 프로이트주의의 반페미니즘도 없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프로이트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혼란에 대해 겸손하게 시인한 적이 있었다. "여성성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질문하거나, 시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아니면 과학이 더 일관된 정보를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또한 마리 보나파르트에게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대답된 적이 없었고, 여성의 영혼에 대해 30년 동안 연구를 해 온 나 자신도 대답할 수 없었던 커다란 질문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이네." 그러한 근본적 불확실성에 직면해서도 계속 여성 심리학을 고집스럽게 구성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커다란 불행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진정한 비극은 여성의 성격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 (타당성을 보장받는) 임상적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에 도움을 요청한 여성들은 그 시대에 "부적합한 여성들"이었다(지금도 그러하다).


여기에는 설명되지 않은 몇 가지 전제들이 있다. 왜 여자 아이는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전제에 즉시 사로잡히는가? 유치하고 순진한 나르시시즘에서, 남근은 이상하게 돌출되어 있는 것이고 자신의 것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남자 아이는 분명 그렇게 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사실상 아이들이 처음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에게는 젖가슴이 있는데 아버지에게는 없다는 사실이다. 출산이 젊은 여성에게 미치는 효과 또한 여기에서 간과되어 있다. 또한 여자 아이는 클리토리스 뿐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는 사실 역시 무시되고 있다.


억압되지만 결코 극복되지는 않는다는 남근 선망이 어떻게 건강과 병리학의 일차적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선한 여성이든 악한 여성이든, 여성의 삶은 "기질적 요소constitutional factor"라는 신비롭기 짝이 없는 결정력에 휘둘리게 된다. 따라서 명백하게 열등한 종족의 구성원인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정숙하게 받아들인다면, 최소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면서 모성성이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한정시킬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계속해서 반항한다면, (프로이트가 경솔하게 확신하는) 남성의 "영역"이라는 더 큰 세계로 침범해 들어가서 남성과 "경쟁"하려 들 것이고, 따라서 남성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여성은 "남성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거나 "남성적 저항"을 하려 한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질투심이 모습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가정하고, 따라서 가지지 못한 자의 상황은 유기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바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러한 철학은, 수많은 부당한 행위를 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현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박탈된 집단에게 그러한 철학이 해 줄 수 있는 충고란 뻔하다. 그리고 그러한 추론 방식이 가져올 사회적•정치적 효과도 명백하다. 프로이트가 보수 사회에서 그렇게 인기 있는 사상가가 된 까닭은 불을 보듯 뻔하다.


프로이트가 아무리 자기만족적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페미니즘 운동은 그에게 상당한 위협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언급은 종종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으로 중단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반항적 여성들에 대하여 반복해서 남근 선망이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해방적이고 지적인 여성이라는 유령을 쫓아내는 주문을 외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한 문화적 성취를 시도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유기체적 열등성을 보상하기 위해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괴짜에 불과하다. 


남근과 지적 능력 사이의 관계를 유기체적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프로이트는, "심리적 영역에서는 생물학적 요인이 진정한 근본 원리"라는 다소 온화한 주장을 편다. 남성의 지적 우월성이 기질적으로 남근과 연관된다는 것은 프로이트에게 확인 가능한 사실에 가깝고, 또한 놀랄 만한 위안을 주는 근본원리인 것이다. 


대체로 프로이트는 남성성을 적극성과, 여성성을 수동성과 일치시킨다. 그는 이를 두 가지 근거에서 정당화한다. 즉 (성교와 사회적 행위에서 표명되는) 프로이트 동시대인의 성행위라는 근거와,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요소와 과정이라는 근거에서다. 정자와 삽입은 적극적이라고 생각되며, 난자와 질이 남근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동적이라고 생각된다. 생물학적 자료는 그 자체로 과장되어 있다. 난자도 난관을 통과하여 여행하므로 어느 정도 적극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정자는 피스톤 같은 자궁경부의 움직임에 따라 자궁에 사로잡혀 들어간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수동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세한 세포의 특질이 보여 주는 사소한 구별에 근거하여 사회 전체의 작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분명 합리적이지 못하다. 


만일 남성성과 여성성이 자연스럽고 기질적인 산물이라고 생각된다면, 남성의 모든 행위는 남성적인 것이며 여성의 모든 행위는 여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말은, 성적 차이뿐만 아니라 지배와 종속을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라는 맥락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므로,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말로 대체되어도 좋을 것이다.


1923년에 그는 논의를 조금 바꾸어, 리비도에는 성sex이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곧 여성성이 일반적 발달 규범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발달 규범이기도 하다고 처방한다. 여성의 특질 중에서 주도적이라 할 수 있는 '수동성'은 예를 들어 "클리토리스를 통한 자위를 포기"하고 어머니가 되려는 오이디푸스기의 열망으로 획득되는 것이며, 이러한 여성성의 고조는 "주로 수동적 본능 충동에 이루어진다."


마조히즘과 고통을 본래 여성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여성의 역할(고통스러워하고 모욕을 받는 등)에 대한 남성적 태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지배와 굴욕을 여성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러한 생각을 논리적 결론이라 믿고 가면, 여성에 대한 학대는 여성에게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 된다.


여성에 대해 자행되는 거의 모든 잔학 행위는 결국 여성의 선천적 마조히즘이라는 이론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잔인한 가능성이 여성을 비롯한 취약 집단에 돌려질 것을 프로이트가 한 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아마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개괄한 마조히즘의 세 종류는 "성적" 마조히즘과 "도덕적" 마조히즘, 그리고 "여성적" 마조히즘이었다. 이후 프로이트는 여성적 마조히즘을 "성적" 마조히즘의 "고통에 대한 열망"과 동일시하는데, 그러면서 여성에게조차 이 마조히즘에 대해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프로이트는 나약한 신부를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성적 예속 상태"에 두는 '능욕'이라는 관습에 대해 훌륭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체계나 절차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최초의 거세에 덧붙여 두 번째 상처 때문에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이 더 이상 처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도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여성은 "예속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한다. 여성이 자신의 입장을 망각하고 적개심으로 응답하지 않는 한, 혹은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한(이러한 반응을 프로이트는 남성을 "거세하여" 복수하려는 욕망으로 해석한다), 이 모든 것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는 관례일 뿐이다. 


정신분석학은 온힘을 동원하여 여성을 여성의 지위에 "적응시키려" 한다. 다시 말해 여성의 지위를 받아들이고 순응하게 만들려고 한다. 사회의 안전과 전통적 결혼의 힘은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는 양성적이라는 가설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적 특성을 보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며 남근 선망의 증거이듯, 남성이 여성적 특성을 보여 준다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놀랍게도 프로이트의 처방은 점차적으로 양성성 개념을 간과하며, 양성성의 징후를 일종의 퇴행으로 간주한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여성의 최대 관심사는 섹스이므로, 그는 (여성이 성 충동이나 성적 쾌락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것도 잊은 채) 여성의 "지식에 대한 애타는 갈망"이 "부도덕한 성향을 보여 주는 내적 징후라는 주장"으로 끝날 수 잇다고 협박한다(섹스는 여성이 연구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성은 지적 욕망을 승화하거나 초월하지는 못한 채, 단지 금지하고 억압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겁먹은 젊은 여성은 공부에 대한 관심을 돌리게 되며, 곧 "정신적 노력이나 지식 일반에 대해 얕보게 된다." 따라서 '성적 억압'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처음에는 여성의 멘털리티가 명백하게 열등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틀림없는 사실은 여성에게 사유를 금지했기 때문일 수 있으며, 이러한 금지는 성적 억압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라고 선수치는 표현뿐만 아니라, "필요로 하는"이라는 혼돈스러운 숙명주의적 표현에 설득당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의도는 여성의 삶을 성과 생식에 한정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저급한 문화 수준에서 사는 것이라는 점을 설득하는 데 있다. 따라서 단지 "남성적 저항"을 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꾸짖기보다는, 여성이 문화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단언하는 것이 낫다. 프로이트는 여성이 종족에 대한 커다란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귀한"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잉여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고 고민한다. 이는 여성을 단순한 생물학적 실존에 묶어 놓음으로써 모성성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멋진 보수적 사고방식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다른 시대에 살았다면, 엄격한 가부장적 훈육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그를 용서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주요 저작은 성 혁명이 한창이던 20세기 초반 30년 동안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남성 우월주의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정보와 여론의 추세가 언제든지 프로이트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페미니즘 비판가들에 답하면서(프로이트는 이 시기에 계속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어느 것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부적절한 농담으로 답변하거나, 남자들이 모두 남성성의 전형은 아니며 어떤 여성들은 (어울리지 않고 잘못된 것이기는 하나) 남자에게 고유한 미덕을 소유하고 있기까지 하다고 유쾌하게 인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다른 형태의 편견도 예외적인 농민이나 흑인, 원주민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법칙을 더욱 입증해줄 뿐이다. 프로이트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순환적인 동어반복 속으로 피신한다. 즉 남성적 편견이라는 공격을 받자, 프로이트는 자신을 비난하는 여성들이 객관성을 열망하는 남성 지향적 주장을 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자기 방어에 대해 비난하는 것으로 답한다. 프로이트 자신은 객관성이라는 것이 남성과 관계없는 특질임을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프로이트는 자신에게 ㅈ반대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나약한 초자아라는 자신의 이론적 모델 덕분에 그들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확신했다. 


[프로이트 추종자댕-에릭슨]


비난이 진단의 이름으로 가해지고 있으며, 처방이 설명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공격적이고 약탈을 일삼는 남성의 "기사도 정신"이 보호해 주는 격리된 모성성이라는 기획은 러스킨의 기획과 몹시 가까워지고 있다. 에릭슨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에서 여성의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여성은 전통적인 가정의 영역과 수동적 기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혹은 이것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에릭슨은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폐기하고 있다. 여성은 비천하고 가정적이며 생식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무능한 반면, 공적으로 유효한 모든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남성은 자신의 본성이라고 정의된 공격성을 계속 행사한다(그리고 이것이 정당하다고 승인된다). 만일 인간의 성적 기질이 타고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진정 희망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에릭슨의 기준에서 볼 때 모범적인 여성은 아이를 40명에서 50명쯤 출산하려는 여성이다. 그 여성이 유독 아무런 결함 없이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고, 유독 강인하여 출산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 훌륭한 인물인 에릭슨은 다산성을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강조하려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게 되면 정액까지 모두 보존해야 할 테니 말이다(자위행위의 산물이든, 몽정의 산물이든, 동성애의 산물이든). 가끔은 가톨릭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기능주의의 한계]


기능주의자들은 사회적•성적 문제에 관심을 돌리면서 '가부장제'가 쇠약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원래 '가부장제'는 엄청난 낭비와 알력으로 작동해 왓다. 그러나 기능주의자들은 가부장제의 낭비와 알력을 "충돌"이라고 인식하면서, 그 책임을 가부장제를 경험하는 개인에게 떠넘기려 한다.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할 것이다. 가치를 은폐하는 것만큼 교활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기능주의는 자신의 준거 틀을 현 상태에 두고 그 너머로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를 자신들이 고안한 기준에 의해 설명하려 한다. 이는 그 자체로 의심스러운 것인데, 모든 방법론이 그러하듯 이는 목적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에 대해 논쟁하지 않는 설명은 그 자체로 편견의 증거가 된다. 현 상황을 측정하고 언급하고 일반화하는 기능주의는 수학을 맹목적으로 숭배할 뿐만 아니라, 인과관계를 무시함으로써 과학적 방법론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굳이 몇 페이지에 걸친 도표를 참조할 필요는 없다. 기능주의는 성차를 측정하면서 양성에 관련된 행위를 수동성과 공격성의 형식으로 측정되고 있는데, 그러한 현상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그것이 학습된 행위인지 아니면 가부장제 사회에 특히 적합한 행위인지는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역할의 차별화는 기능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그러한 기능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상호보완적 역할이 체계 내에서 안정적 작동을 증진시키는 한, 그것은 기능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한다. 


기능주의는 현재 끊임없이 작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역동적인 성장과 변화에 대항하여 '안정Stability'이라는 이상을 제시한다. 가치를 무시하는 기능주의는 역사적 순박함에 호소하거나, 실제로는 역사적 증거 자체를 없앰으로써 역사를 무시한다. 기능주의자에게 역사는 정보에 불과하므로, 가부장제 같은 제도의 관점에서 사회학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실용주의적이지 않고 늘 불공평했으며 갈수록 낭비적으로 되어 가는 가부장제하에서의 성 역할을 해석할 수 있게 한다. 기능주의는 가부장제를 언급하지 못하거나(기능주의자의 텍스트에서 가부장제라는 단어는 성경의 모호한 색채를 띤 형용사로 사용될 때를 제외하고 찾아볼 수 없다), 사회적 정치체로서 가부장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단순히 가부장제는 인간 최초의 집단화 형태이자 모든 사회의 기원이라는 까닭으로 논의하기에는 너무 기초적인 것으로 가정할 뿐이다. 성 혁명이 부분적으로 여성의 해방을 성취하면서 이루어 낸 거대한 사회적 변화는 고의로 간과되고 있거나, "역할 변화"라는 표현을 통해(이로써 수많은 사회 부적응자를 낳았다고 한다) 의미론적으로 삭제되어 있다. 안정이 성공의 척도가 되는 곳에서는 변화가 환영받지 못한다.


 문명의 가장 불행한 측면 중 하나는, 학문이나 과학적 관심사가 문화에 너무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나치 독일은 자신만의 사회 조사 방법을 고안했고, 인종차별 국가는 자신의 광적 증오를 합리화해 주는 인종차별 과학을 꾸며 냈다. 미국의 사회과학은 수십 년간 상당한 자유를 성취하면서 인종차별적 편견을 이제 막 몰아내고 있는 데 반해, 수십 년간의 반동의 산물인 강력한 "성 차별적" 편견은 여전히 사회과학 분야에 만연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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