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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월주의의 강박]


여성의 지배를 발견하고 한탄하는 습관은 갈수록 강박적으로 변했다. 특히 남성의 성적 정체성을 자아 발달에서 매우 중대한 것으로, 따라서 남성의 특권에 대한 요구가 좌절되면 심각한 정신적 손상(신경증이나 동성애 등)을 가져오게 된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경우에는, 남성 우월주의가 유지되는 것이 치료에도 필요한 일이고, 사회적으로도 건강한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이는 실로 계급에 대한 완벽한 사례다. 남성에게는 인간의 합리성이 가진 모든 미덕이 부여되어 있으며,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우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또한 "빈둥거리고 꾸물거리는"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이라는 가벼운 과실도 자기 비관적으로 솔직하게 열거되어 있다. 여기에는 우월한 계급의 역할을 보존하려는 열의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표현적"이라는 재미있는 규정에 해당하는 항목들에는, 여성에게 부과될 수 있는 모든 악덕이 열거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성 혐오주의 전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을 떠올리게 된다.


남성 우월주의 사고방식의 비인간성을 보여 주는 이 목록에서, 온유한 특징(애정, 동정하는 반응, 상냥함, 발랄함)이 하층계급에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만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의 "양육" 기능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항목들이 수두룩하다. 남성은 이 항목을 여성에게 부과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남성의 욕구를 채워 주지 않는 한, 그 항목들이 여성에게 속한다고 간주하면서 그것의 가치와 유용성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목록은 양성의 승인된 관계를 놀랄 만큼 잘 폭로하고 있으며, 대체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한 문화적 가치의 색인을 제공하고 있다. 시카고학파가 효율성을 측정했던 그 어린아이들이 모욕적인 "역할"의 요구에 맞추려고만 했다면, 우리는 유년기에 대해 부정적인 행동의 조작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작은 신뢰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온순함이라는 특징이 때로 발견되며, 어떤 여자 아이들은 기대에 맞게 "고분고분하다." 그리고 이는 실로 자신의 "역할"에 "적합한 특성"이라고 한다(이는 맨 오른쪽 란에 친절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또한 분노와 질투, 복수하려는 욕망, 협력에 대한 거부, 그리고 (우리를 가장 심란하게 하는) "자신의 권리에 대한 집요한 주장"에 빠질 수 있다.
 이 도표의 정치적 함의를 밝히고자 한다면 이 범주들을 다른 정치적 계급과 바꿔 보기만 하면 된다. 남성과 여성을 흑인과 백인으로 바꿔 본다면, 인종차별적 사회의 상황과 그것이 기대하는 것에 대한 완벽한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고분고분함과 착한 성격을 ㅅ기대하는 것도 설명될 수 있고, 그러한 성격에 동반되는 복수심과 분노, 협력 거부에 대한 백인의 공포심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귀족과 농민의 구분에도 들어맞는다. 


[자댕문학비평-로렌스]


프로이트 학파는 "여성의 성취"니, "수용하는" 수동성이니, "성인"의 상상적인 질 오르가슴이니 하는 원칙을 선전했다. 심지어 프로이트와 제자 몇몇은, 섹스할 때 남근이 클리토리스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질 오르가슴을 해석해 내기도 했다. 이러한 관념은 로렌스의 손에서 여성의 완벽한 종속을 위한 뛰어난 도구로 변형된다.)


"인간의 문명은 바닥 없는 구렁으로, 지옥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겁니다. 그런데 그 파멸의 구렁을 건너게 해 줄 유일한 다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남근일 것입니다!"("채털리 부인의 연인" 중) : 이러한 비유는 불쾌하다. 남근의 길이를 생각해 보면 그러한 미래라는 것이 그다지 가망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코니가 여기에서 단념하고 있는 것은 자아, 에고, 의지, 개성 등(여성이 최근에야 발전시킨 것들), 로렌스가 극심하게 혐오하는 것들이다. 로렌스는 그 모든 것들을 전멸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종종 비평가들이 로렌스에 대해 평가하는 바에 따르면, 로렌스는 양성에게 의지를 가지고 악전고투하거나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라고 권고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상일 뿐이다. 로렌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멜러즈를 비롯한 로렌스의 남자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여성들과 자신보다 못한 남성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 지배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남성이 권력을 휘두르는 개인주의자가 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은 로렌스에게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오직 여성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할 뿐이다.  

모렐 부인은 성인 같은 황홀함으로 아들의 칼라를 다림질한다, "아들이 칼라를 자랑스러워하도록 해 주는 것은 그녀의 기쁨이었다. 세탁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윤을 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볼록 다리미로 칼라를 문질러 댔고, 마침내 순전히 팔 힘만으로 칼라는 윤이 나고는 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로렌스는 "천재는 대부분 위대한 어머니를 두고 있다는 말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슬픈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즉시 덧붙이는데, 여기에는 "아들과 연인"에 대한 편지의 요약에서 감지할 수 있는 자기 연민이 있다. 어머니의 애정이 아들에게 부정적 효과를 미친다는 것에 대해서도 로렌스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어머니가 장애물이 되는 때가 언젠가는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국 최초의 주요 노동계급 소설가이자 개인의 구원을 통한 계급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토마스 하디와는 정반대로, 로렌스는 19세기의 관념이었던 개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예외적인 남자는 자신의 계급을 탈출하여 신분 상승하겠지만, 그래도 계급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로렌스는 두 세계 모두를 이겨내려 한다. 즉 그는 노동계끕보다 더 나은 계급이 되기를 원했고, 노동계급을 뛰어넘는 교육을 받았으며, 노동계끕의 친밀함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중산계급과 상류계급까지도 뛰어넘으려 한다. 이 때문에 로렌스는 노동계급의 동물적 에너지와 따뜻함, 저속함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이며, 자신의 대리인들을 친구 부르주아지들보다 더 우월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로렌스가 민주주의를 그토록 증오했던 이유도 재능 있는 개인이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계급을 함께 상승시키려고 한다. 반면 로렌스가 선호하는 고립된 개인의 상승은 봉건주의적 혹은 칼뱅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이 오랫동안 남성의 향유물이었던 문명화된 조건을 향해 돌진하고 있음을 본 로렌스는, 여성(최소한 그의 표적이었던 신여성)을 다소 세련된 적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는 로렌스의 동시대 작가들이 취했던 임기응변과는 정반대다. 로렌스의 동시대 작가들 중에서 포크너와 조이스는 여성을 "손상되지 않은 원시적 지혜"를 가진 "자연"으로, "영원한 여성성"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했다. 여성의 성격을 수동성과 마조히즘이라고 제시함으로써 로렌스의 동의를 얻었던 프로이트조차도 여성은 매우 천진한 미개인이라고 생각했다. 로렌스는 문명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여성의 본성이라고 가정했던 그 원시적 조건에서 여성이 실제로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을(왜냐하면 신여성이 도래했으므로) 인정할 만큼 현실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성을 과거로 억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과감한 수단이 필요하다. 즉 여성의 의지를 꺾어야 하고, 여성이 새로이 발견한 자아를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렌스의 소설에서 여주인공들은 매번 여성적 부분을 새로 학습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에서 '자연'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으므로, 때로는 몹시 혹독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말을 타고 달아난 여인>이 이러한 경우다. 비평가들은 이 이야기가 알레고리적이며 상징적이라고 모호하게 얼버무림으로써 그 의미를 둘러대려 했다. 물론 이는 사실이다. 런던교 위에 매달려 있는 참수당한 머리처럼 노골적으로 상징적이다.


로렌스식 성적 종교의 핵심적 행위는 살해 행위로서의 섹스이며, 그 핵심 장면은 위대한 남성의 영광과 성적 능력을 위해 여성을 인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다. 하지만 성적인 능력을 시체에 발휘할 수는 없으므로, 이 우화의 의도가 순전히 정치적이라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몹시 명백하다. 인간의 생식기를 무기로 바꿈으로써 그는 섹스를 전쟁으로 바꾸었다. 아마도 이 작품의 소름끼치는 미치광이 같은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를 잔인한 살인으로 왜곡하는 것,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억지스럽게 희화화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자댕문학비판-헨리 밀러]


밀러는 프랑스인의 섹스가 더 문명화된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프랑스의 더 나은 상술을 증거로 내세운다. 프랑스에서 창녀의 고객은 "구매 전에 상품을 검토하고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고 하는데, 밀러는 이를 "공평하고도 공명정대한" 관행이라고 찬양한다. "상품 주인"과 굳이 말다툼을 하지 않아도 될 뿐더러, "비누나 수건에 대해 별도로 돈을 내는 것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호텔에 여자 여섯을 데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만큼 그곳의 거래는 자비롭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달러 문화에 대한 만족감으로 가득한 이곳은 돈만 지불할 수만 있다면 하등의 인간적 고려를 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호텔에서 나는 벨을 눌러 위스키와 소다를 갖다 달라고 하듯이 여자를 불렀다"고 허황한 이야기를 자랑한다. 밀러는 외국인이 이런 일에 더 뛰어나다고 확신하는 양키 플레이보이처럼, 돈의 힘에 취해 있는 것이다.


밀러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성이란 창녀다. 로렌스는 매춘을 신전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간주했지만, 밀러에게 섹슈얼리티의 상업화는 남자에게 만족을 주는 편리한 일일 뿐만 아니라(설득하는 것보다 돈을 지불하는 것이 더 쉬우므로), 여성의 존재를 완성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즉 여성을 절대적 음부라는 기능으로 효과적으로 한정시켜 주는 일인 것이다.


"창녀는 창녀일 뿐"이기 때문에, 밀러는 창녀를 "탐욕스러운 인간"이자 "비열한 인간", "강탈하는 악마", 그리고 "화냥년"이라고 욕을 퍼부을 수 있다. 그것은 밀러의 진부한 감상주의만큼이나 마땅한 경멸이다. 그러나 밀러는 창녀의 기능을 "사상"으로까지, 즉 '생명력'이라는 사상으로까지 향상시키려고 안달한다. 마치 전기 도체처럼, 창녀에게 플러그를 꽂으면 남자는 "양다리 밑에서 다시 대지를 느끼게 하는 전기 회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매춘부들은 자신의 일을 "봉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밀러의 흡족한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을 신비호하는 것으로 재충전할 뿐만 아니라, 창녀를 남자들 사이의 기묘한 의사소통(열광적 낭송) 도구로 바꾼다, "그녀가 함께 했던 모든 남자들 그리고 이제 너 (...) 생명의 모든 물결이 너를 통해, 그녀를 통해, 너 이전과 이후의 모든 남자들을 통해 흐르고 있다." 여기에서 놀라온 것은 섹슈얼리티를 완전히 추상화하는 생각(전기만큼 단단하지도 않고 조형적이지도 않는 것이 있겠는가?)뿐만 아니라, 특이하게도(하지만 흔하게) 창녀의 질 속에 있는 다른 남자들의 정액을 사냥한다는 생각, 창녀의 질은 형제애적 생명력이 임의로 흐르고 잇는 도관이라는 생각이다.


여성을 인간으로 보려는 충동(덧없는 욕망)이 잠깐 동안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은 청소년 같은 나르시시즘의 끔찍한 욕구다. 그리고 비인격적 물질이자 영혼 없는 세포 조직에 불과한 것과 끝없이 성교하고 싶다는 비열한 꿈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거기에는 늘 이기주의의 전율이 존재하다. 즉 비열하게 사기 치는 황홀감, 거짓말하고 꼬드기고 속이고 고의로 모욕을 주고 그러고 나서 명령을 내림으로써 얼간이를 부추기는 흥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얼간이의 "동물성"은 밀러의 초연한 우월성을 확증해 준다. 이 모든 위안거리는 섹스 자체의 역겨움을 보상해 준다.


밀러는 남성 문화가 오랫동안 경험했으나 항상 조심스럽게 억눌러왔던 특정한 감상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즉 여성을 음부로 완전히 탈인격화하려는 열망, 값싸게 착취하는 게임과 같은 섹슈얼리티, 실제 인간이라는 현실성이나 동료 인간을 다루는 복잡함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권력에 대한 유치한 환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격상 항문의 배설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는 유치한 배출에 대한 열망 등등의 감상을 말한다.


[자댕문학비평-장 주네]


동성애 예술은 이성애의 삶에서 통찰력을 얻지 않고는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 물론 "동성애가 아닌 정상적straight" 사회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모욕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 예술은 이성애 환경에서 자라나므로, 부득이하게 이성애의 관념을 모방하고 반복하며 심지어 패러디하기도 한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하자면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만큼이나 비뚤어져 있고, 둘의 과거는 거의 똑같으며, 둘의 정치학은 명백히 동일한 모방이다.


주네의 소설 속에서 "여성성"의 관념은 이면의 선동 때문에 낙담하여 비굴하게 단념하고 순교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후기 희곡 작품에서는 새로운 방향, 즉 타협하지 않는 반항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정치적 관심이 증대되고 동정심과 인간애가 확장되면서, 주네는 하녀나 흑인, 알제리인,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하여, 자본과 인종차별주의 혹은 제국에 대해 여성적이고 종속적 역할을 하는 모든 억압된 집단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노예적 멘털리티라는 여성성의 부정적 측면은 이제 그 희생자들이 투쟁하는 대상이 된다. 이들은 갈수록 분노하면서, 처음에는 "하녀들"에서처럼 헛되고 자기 파괴적으로 투쟁하다가, 이후 작품에서는 갈수록 지적이고 성공적으로 투쟁하게 된다.


억압은 억압된 자의 심리를 만들어 낸다. 맑시즘은 그러한 사람들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분석하는 데는 능숙했을지 모르겠으나, 억압된 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상황 때문에 타락하게 되는지, 주인을 얼마나 격렬히 시샘하고 찬양하게 되는지, 주인의 생각과 가치에 얼마나 철저히 오염되는지, 자신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에 대한 태도마저 특정 방식으로 강요당하는지 소홀히 했다(아마 불안하고 낙담해서일 것이다).


하녀들의 고통은 극심하지만, 그들에 대한 억압은 너무나 효과적이다. 자신의 곤경을 다른 사람의 정의에 의존한다면, 아직은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혁명은 반혁명으로 타락한다. 창조적 대안이 부재한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는 과거의 질서를 흉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대편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면 우리는 바로 반대편 사람인 거야." 하고 반역자들 중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지적인 로제가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대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파괴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임을 그는 잘 안다. 의식의 변화가 없는 대중의 반란 또한 단순하 ㄴ쿠데타일 뿐이고, 대부분의 쿠데타가 그러하듯 파시즘적 임시정부로 끝날 뿐이다. 흑인들은 "발코니"의 반역자들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들은 대안적 가치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서구 문화에서 백인의 절대적 가치(신께서 보내 주신 것은 모두 청결하다는 가치)에 대항하여, 그들은 흑인의 힘을 주장한다. 주네는 머리말의 주석에서 "흑인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흑인의 색깔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이는 피부색이라는 것이 공통의 인간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질문인 동시에, 흑인성이란 백인 우월주의사회에서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수수께끼다. 여기에서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종적 피부색에 대한 억압, 즉 '검음'에 대한 억압에 기초하여 백인이 흑인에게 행사하는 정당화가 없다면, 혁명은 굳이 흑인에게 흑인인 것을 절대렂ㄱ으로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부여한 정체성에서 탈주하기 위해서 흑인들은 우선 그러한 정체성을 객관화해야 한다. 흑인들은 조롱과 과장을 통해, 숯검정같이 시커먼 분장과 2색 구두, 화려한 옷 등의 "검둥이스러움niggerishness"를 통해 이러한 객관화를 성취한다. 다음으로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주네는 긍정적인 집단 정체성의 출현은 혁명 의식에 선행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집단 정체성이 혁명을 의미 없느 ㄴ폭동(이는 강도 높은 반동으로 되돌아가 ㄹ뿐이다)으로부터 구별해 준다는 것을 올바르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 피식민지인, 여성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부과한 정의에 갇혀 있는 수인들과 같다. (하녀들처럼) 자기혐오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혹은 ("발코니"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에 대한 전통적 환상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자아를 확신하고 단결을 주장함으로써 자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현대 작가 중에 유일하게 주네만이 여성을 억압당하는 집단이자 혁명적 힘으로 간주했고, 스스로를 여성과 동일시하기를 선택했다. 그 자신의 특이한 내력과, 빼앗긴 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은 그를 불가피하게 경멸당하고 예속되는 상대적인 존재들에게 감정이입하게 이끌었다. 그의 후기 작품은 성적인 상황을 정치적 상황에 융합시키고 있다. "발코니"에서는 권력과 성을, "흑인들"에서는 인종과 성을, "병풍"에서는 성적 서열과 식민적 멘털리티를 융합한다. 로렌스와 밀러, 메일러는 여성을 깔아뭉개야 할 불쾌한 소수 세력으로 간주하고, 여성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사회질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주네는 여성을 급진적 사회 격변에 포함시키며, 그 속에서 여성의 오랜 종속은 폭발적 힘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병풍"에서 여성들은 혁명 그 자체다.


[저자 후기]


다른 진보 세력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전쟁과 남자다움이라는 남성적 전통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저항이 있었다. 물론 최근 들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 발전은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의 출현이다. 그러한 발전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여기에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 혁명에 관계된 거대한 사회 변화는 근본적으로 의식의 변화라는 문제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구조에 깔려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현실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문화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 혁명으로서 성 혁명은 전통적으로 혁명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정치적•경제적 개혁을 수반해야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러한 개혁을 훨씬 더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이 내포하고 있는 심오한 변화란 과장된 무장투쟁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성숙과 진정한 재교육으로 완수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여 헌신하게 하고 창조적 지성을 발휘하도록 이끈다면, 일상적으로 폭력적 전략에 의존하는 자기 파괴적 수단은 불필요해질 것이다. 이렇게 믿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 과정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예를 들어 2년 안으로 학생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이 시대의 현대적 의사소통은 계획적으로 그 속도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어 왔던 집단이며, 수적으로나 열정의 측면에서나 오랜 억압의 역사에서나 가장 거대한 혁명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인류를 성적•사회적 범주와 횡포와 성적 고정관념에서의 순응에서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인종적 신분 계급caste과 경제 계급class을 폐지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역자 후기]


밀렛은 열일곱 살에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여 11학기 만에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56년에 "학자가 되기 위해 옥스퍼드로 갔다." 1958년에 밀렛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우등생으로 대학원을 수료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밀렛은 학위를 마치지 않은 채 다음해 뉴욕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조각에 심취하게 되면서 공부를 "때려치웠기" 때문이었다. 뉴욕에 돌아온 밀렛에게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밀렛은 보웨리의 추운 스튜디오에서 가난한 조각가로 살아갔고, 196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조각을 했다. 그리고 2년 후, 일본인 조각가인 후미오 요시무라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따. 이후 밀렛은 바너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콜롬비아 대학의 영문학 및 비교문학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그리고 1970년 7월, 우여곡절 끝에 박사 학위논문인 "성정치학"이 출간되었다.


"성 정치학"의 출간은 말 그대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1970년 8월 31일자 "타임"지는 밀렛의 초상화를 표지에 실으면서 "성 정치학"을 특집으로 다뤘다. 그리고 밀렛을 "여성해방의 마오쩌둥"이라고 불렀다.
"성 정치학"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밀렛은 일거수일투족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이자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밀렛의 유명세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밀렛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열린 여성해방 컨퍼런스에 패널로 참석했는데, 청중 속 어느 여성이 밀렛에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왜 여기에서 당당하게 레즈비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거죠? 과거에는 레즈비언이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밀렛은 그 자리에서 자신은 양성애자라고 대답한다. 이 자리에는 "타임"지의 기자도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은 채 참석하고 있었다. "타임"지는 1970년 12월 8일자에 이 해프닝을 실었다. 긜고 밀렛의 폭로는 "모든 여성해방주의자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해 버리는 회의론자들의 생각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성운동 진영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 같은 <전국여성협회(NOW)>의 지도자들은 밀렛을 옹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NOW>의 뉴욕 지부는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람을 조직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반면 동성애 운동 진영에서는 밀렛이 더 빨리 커밍아웃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실상 밀렛에게는 애초부터 여성 운동의 지도자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억압적 위계질서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므로 여성운동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 입에 마이크를 쑤셔 넣으면서 '여성운동의 미래는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해 댔다. 젠장, 내가 그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베티 프리던이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처럼 페미니즘의 주역이라는 역할로 만족하는 "훨씬 뛰어난 정치가들"과는 달리 밀렛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끈질기게 오해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밀렛은 조울증에 시달렸고, 양성애자였고, 동성애 해방주의자였으며, 은둔하는 조각가였고, 도전적인 활동가였고, 무엇보다도 뼛속 깊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철저한 반골이었다. 그러니 밀렛이 보기에 가부장제를 모방하는 '정치가'에 다름없는 여성운동 진영 지도자가 될 수도 없었고, 자신이 비판하고 도전했던 보수적 학계에 안전하게 몸담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신 밀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밀렛이 이 책을 통틀어 강조하고 있는 지점은, 성 해방 없이 진정한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군의 인간이 "생득적 우월성"을 가지고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 혁명이 우선하거나 최소한 함께 가야 한다.


밀렛이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성sex'의 정치적 측면이다. '성'이란 단순히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주관적인 영역이 아니라, 명백히 권력과 지배 개념이 작동하고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밀렛은 "양성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성 정치학'이라고 일컫는다. 이때의 '정치학' 혹은 '정치'란 "일군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받는, 권력으로 구조화된 관계와 배치"를 칭한다. 밀렛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자연스러운' 관계인 양 이데올로기적으로 신비화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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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남류문학 놈딱 역겹노
성혁명 간다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