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국민이 주신 소중한 121석-

한번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국민들계 한 번 만 더 기회를 달라며 간절히 호소했다. 진심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국만만 생각하는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곘다는 약속을 드리며 전국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었던 친구에게 배반당한 심정으로 매몰차게 돌아선 그 마음은 수비게 누그러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번은 택시를 탔다가 나를 알아보는 기사뽀이한테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잘되던 회사가 망해서 1년 전에 이 일을 시작헀는데, 제가 요새 남정치인들 때문에 혈압이 무섭게 오릅니다. 시골 행사에 국회의원남이 나타나도 누구하나 나서지 않을 정도로 국회가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놈의 말에 나는 한마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민심은 그렇게 차갑기만 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3월 30일 밤에 나의 텔레비전 방송연설이 나가고 나서부터였다. 그날 방송연설 녹화장으로 향하는 내내 한 가지만 생각했다.

 

국민께 다가갈 때마다 나의 모든 진심은 단 한 곳으로 향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지금 국민에게 외면당하는 정당의 대표다. 진심을 다해 호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고 스태프들의 시선이 내게 모아졌다. 가슴속에 봇물처럼 고여 있던 말들이 단번에 쏟아져나왔다. 나는 평소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은 가난한 나라를 지금처럼 일구어내기까지 우리 국민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를 회상하며 마음이 복받쳐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남라당이 국민 여러분꼐 얼마나 많은 실망을 드렸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나태했습니다. 부패와 적당히 타협했고, 기득권을 누리려고 했으며,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점점 오만해져갔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사죄하는 마음 하나만 남기고 다 버리곘습니다."
목이 메어오고 목소리를 떨리고 있었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우린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일으켜 세운 한남민국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남통령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책임을 따지지 않겠습니다. 저희 한남라당은 왜 책임이 없겠습니까? 국민 여러분의 아픔을 제대로 보살펴드리지 못한 저희부터 반성하곘습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녹화장에 함께한 분들도 모두 울었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진심을 알아주셨는지 따듯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분들이 많아졌다. 아이를 업은 한 주인은 "저도 봤어요, 같이 울었어요"하며 승리의 브이를 그려주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다시 한 번 한나라당에 기회를 주자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두세 시간 쪽잠을 자면서 강행군을 헀다. 입술이 부르트고, 무리하게 일정을 잡다 보니 유세 도중 현기증이 일기도 했다. 악수를 너무 많이 해서 손이 부어오르고 손목도 시렸다. 별별 방법을 다 썻지만 손은 더 붓기만 했다. 나중에 수저조차 들기가 힘들었다. 선거 닷새를 남겨놓고 손에 붕대를 감아야 했다. 하지만 손이 부어오르는 만큼 한남라당의 지지율도 올라갔다. 처음 10석 예상했던 것이 20석, 30석, 50석... 당선 가능 지역이 늘어갔다. 어디를 가든 "박근혜 왔다"며 뛰어나와주시고, 안아주시는 국민들 때문에 더욱 더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분들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으려면 정말 제대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4.15 총선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악수한 손이 부어오를수록 한남라당의 지지율은 높아졌기 때문에 나는 아파할 새도 없이 국민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지막 날은 경기, 서울, 인천 접전 지역을 돌고 대구에 가는 일정이었다. 전국을 누비느라 정작 내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기 떄문에 마지막 날 밤에라도 달성을 찾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수도권에 워낙 초박방 지역이 많아 잠시만이라도 자기 지역에 들어 달라고 애원하는 후보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절박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몇백 표 차로 당락이 결정되는 수도권 아닌가. 나의 일정은 계속 늘었고, 부산의 여당 후보들이 삭발 호소를 하자 한남라당 호부들로부터 부산에 방문해 달라는 절박한 요청이 왔다. 내가 달성에 도착한 시간은 밤10시 , 선거운동 마감시간 직전이었다. 인사를 하자마자 선거운동 시간이 끝나서 지역구민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후보가 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표를 주신 달성 주민 여러분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한남라당은 4.15총선에서 결국 121석을 얻었다.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한남라당이 원내 제1당이 도ㅒㅆ을 거라며 애석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10석도 못 건질 거라고 했던 우리에게 그것도 열두 배도 넘는 의석을 주신 국민이었다. 그 121석은 너무나 소중한, 그리고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숫자였다. 한남라당은 국민이 주신 너무나 감사한 121석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박근혜의 개혁은 계속된다-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나는 정당개혁과 정당 민주화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하지만 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을 상대 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당권을 쥔 사람이 선택하기엔느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도 헀다. 그렇게 하면 당장 당내에서 다양한 도전이 있을 것이고, 일사분란하게 당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워진다. 당시는 굳이 그런 어려운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정치문화였다.
나는 한남라당 대표가 되면서 그간 줄기차게 주장해온 일들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옳은 길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당을 운영하는 사람이 힘들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당은 사당(私黨)이 되고 말 것이며,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들은 손만 들 줄 아는 거수기가 되고 만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주장해왔던 정책 정당, 원내 정당, 디지털 정장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하나하나 실천했다. 원내 정당을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한일이 의원총회를 바꾼 것이다. 의원총회는 줄여서 '의총'이라고 한다. 당에서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 의원 전체가 모여서 당이 어떻게 할지를 정하는 회의이다.
제일 먼저 변한 것이 의총장의 모습이다. 전에는 총재나 당 대표가 단상위의 큰 의자에 앉아 의원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그 의자를 치워버렸고, 의원들 사이에 앉았다. 대표도 한 명의 의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니까 뭔가 권위적이던 분귀기가 달라졌고, 후배의원이 선배의원들 앞에서 자기 생각을 자신 있게 밝히기 꺼려하던 분위기 또한 사라졌다.
그 다음으로 의총장이 전챙터와 사장통같이 떠들썩해졌다. 전에는 지도부가 다 결정해놓고 의총을 형식적으로 거쳤다면, 지금은 의총장에서 모든일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총을 거치지 않고 지도부가 함부로 뭔가를 발표할 경우, 다음 의총장은 성토장을 방불케 한다. 고성이 오가는건 기본이고, 누군가가 마음에 드는 발언을 할라치면 "자--알 했어" 하는 추임새가 어김없이 들어갔다. 어떤 기자들은 한남라당의 의총은 서부 호라극을 보는 느낌이라고 관전평을 하기도 한다.

내가 대표가 되고 나서 의총장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국가보안법 투쟁 떄 법제사법위원회 점거농성에서의 마라톤 의총을 잊을 수가 없다.
2004 가을, 노무현 남통령이 한 방송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이후 온 나라가 이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나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 중에서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조항에 대해서는 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보안법을 유지한 채로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남라당 내에서도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을 지키자고 하면 우리가 너무 수구적으로 보인다. 못 이긴 척 양보하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안 된다 . 한 자도 고칠 수 없다"는 의견, "개정하되, 핵심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개정안보다 더 나가면 폐지다"라는 의견 사이에 수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여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내고, 국회 과반수 의석이라는 숫자로 밀어붙이려 하고 있었다. 나는 나라의 뿌리까지 흔들 수 있는 중요한 법안이 강행 처리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당 대표가 된 후 처음으로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을 점거하면서 농성을 벌였다.
2004년 12월 말 본회의를 앞두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총이 열렸다. 어떤 의원들은 의자에 앉고 어떤 의원들은 섰다 바닥에 앉은 이들도 있었다. 다들 눈은 퀭하니 지쳐 있었다. 여러 날 밤생농성으로 평소 말쑥하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이날의 끝장토론은 의원들이 자신의 국가관과 가치관을 모두 쏟아붓는 자리였다. 40명에 가까운 의원들이 발언을 했다. 나는 의원들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도 했다.

 

열정을 다해 의견을 개진하는 의원들의 말은 하나도 놓칠 수 없어 늘 긴장을 하며 귀 기울인다


열두 시간이 넘게 이어진 마라톤 의초잉었음에도 개정의 폭과 범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었다. 특히 가장 핵심적인 정부참칭 조항과 국가보안법의 이름을 바꾸는 부분은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이에 의원들은 가장 민주적 방법으로 투표를 통해서 대표인 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주었다. 그렇게 의총이 끝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끝까지 지켰다.
행정중심복합도시법, 사학법 장외투쟁, 당명 변경, 당혁신안을 등을 결정 할 때마다 무수한 토론이 벌어졌다. 떄로는 의원들이 멱살이라도 잡을 듯 서로 고함치고 투표까지 가기고 했다. 그러나 의총장을 나서면 너무나 다정한 동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의총장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도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 개혁을 위해 정말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한 힐도 있다. 공천권을 포기한 것이다. 대표가 선거 때마다 후보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당은 대표 개인의 사당이 될 수밖에 없다. '설말 정말 포기하겠어?'라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공천권 포기가 진심임을 알자 말리기 시작했다.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시늉만하고, 대충 자기 사람 챙기고 하셔야지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정치는 편 먹기입니다. 앞으로 큰일 안 하실 겁니까? 정치는 쇼입니다."
정색하고 화내는 사람, 설득하는 사람 등 정치에 들어오고 나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욕을 많이 먹기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면 해야 하고, 진심으로 해야 한다. 시늉만 내는 건 금방 들통이 날 뿐 아니라 결국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나는 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대표로 취임하자마자 있었던 17대 총선 비례대표 공천에서부터 한남라당의 '공천혁명'은 시작됐다. 비례대표는 당 대표가 개인적으로 믿을 수 있고 친한 사람을 지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나는 공천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한남라당의 비례대표는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 채워졌다. 덕분에 한남라당 비례대표는 한남라당의 정책통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려가 그룹이다. 대표로 있는 동안 치뤘던 네 번의 재보궐선거도 마찬가지였다.
2006년 지방선거 떄는 공청권을 아예 시.도의 당에 내려보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잡음이 생겨났다. 처음 해본 혁명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혼란도 많았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공천을 받는다"."위원장이 돈을 받아먹었다" 등 수많은 흉흉한 소문이 터져나왔다. 불행이도 이 일 떄문에 중진 두분을 당이 직접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일부 얼론매체는 "박근혜 실험정치 기로에 서다"라는 제목을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제도든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다. 방향이 맞는다면 부작용은 고쳐가면 된다. 처음부터 부작용을 걱정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면 개혁은 불가능하다. 다행히 지방선거에 대승을 거둔 덕에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친 아래로부터의 공천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지역을 제일 잘 알고, 주민들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일꿀들이 이웃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 대표 임기 동안 나의 정치개혁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정치의 '정'자도 모른다","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없다","그렇게 하니까 필요할 때 자기 사람이 없다"등 온갖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한 개혁이야말로 국민들이 진심으로 정치에 바라는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
 

-싸이에 빠져들다-

미니홈피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4년 2월, 열 명 남짓 되는 20대 초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다. 우리 정치, 특히 한남라당의 정치가 젊은이들과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나는 많은 젊은이와 대화를 통해 해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젊은이들은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20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해 묻는 나의 질문에 한 학생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미니홈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묻자 싸이월드, 미니홈피, 일촌맺기, 파도타기, 랜덤 미니홈피 가기 등에 대한 설명이 쏟아졌다. 한 학생이 가까이 있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의 미니홈피를 보여주며 '싸이질' 시연회를 펼쳤다.
"뭐니 뭐니 해도 싸이질의 묘미는 파도타기예요. 아무리 친한 친구도 매일 보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싸이를 하다 보면 늘 같이 있듯이 서로의 마음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어요. 싸이를 하면서 멀ㅇ리 유학 간 친구와 한국에 있는 떄보다 더 친하게 지내기도 해요."
미니홈피는 그렇게 나를 사로잡았다. 듣기에도 보기에도 좋았다. 보좌관들에게 싸이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벌써 싸이를 하고 있다며 자신의 미니홈피를 보여주었다. 학생들의 설명과 보좌관의 도움으로 '박근혜의 미니홈피(http://www.cyworld.com/ghism)'가 2004년 2월 21일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나의 어린시절 사진을 올리고, 의정활동 이릭도 조심스럽게 적어봤다. 아직 손에 익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대문 사진도 걸고, 미니미와 미니룸도 꾸몄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하나둘 댓글이 달리고 방명록의 글이 늘기 시작했다. 로그인을 해보면 다정한 쪽지, 일촌신청, 배경음악과 도토리 선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게 '싸이폐인' 증세도 나타났다. 오늘은 누가 방문했을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나의 소소한 일상과 생각에 어떤 댓글을 달았을지 기대하며 하루에 한 번은 꼭 싸이에 들르게 되었다. 그동안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하지만 나의 일촌들과 공유하고 싶은 일상 속의 나와 70년대 촌스럽고 어린 내 모습을 올리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했다. 싸이 식구들은 나의 솔직한 모습에 따뜻한 응원을 보내줬다. 순식간에 많은 일촌을 사귀었고, 나는 일촌들의 관심과 따스함에 중독되었다.

"대표님, 솔직히 싸이 관리는 누가 하나요?"
얼마 전 5백만 번째 미니홈피 방문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옆에 있던 기자가 물었다. 당연히 관리자가 따로 있지 않느냐는 가정이 묻어나오는 질문이었다.
"제가 하죠, 보좌관들도 제 싸이 비밀번호는 모르는 걸요"
사실 당 대표 '민생투어' 일정이 한창 빡빡해졌을 무렵, 주변에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으면 체력 보충을 위해 쉬어야지 싸이를 해서 되곘느냐'며 관리자를 두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미니홈피를 나만의 사적인 공간으로 가꿔가고 있는데, 이것을 남에게 맡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내가 직접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싸이 가족을 속이는 일이었다. 나의 미니홈피에 올라온 '작성자 박근혜'사진과 글은 100퍼센트 내 손으로 올린 것들이고, 일촌신청도 모두 내가 직접 수락하였다.
그렇다 보니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여러 일정에 밀려 일촌 홈피에 들러서 일촌평 한 줄을 못 남기고, 일촌 대기자 수락도 제떄 못해서 기다리고 있는 분들만 1만 명이 넘는다. 가끔 일촌을 신청한지 몇 달이 지났는데 언제 해줄 거냐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 기회를 빌어 일촌 대기 상태인 분들과 일부러 홈피에 흔적을 남겨준 여러분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싸이 일촌 1백만 번쨰 주인공인 학생과 게임을 하며 보낸 즐거운 데이트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미니홈피는 나의 공적인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앞으로 내가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가 되었기 떄문이다. 방문자가 늘고 게시판과 방명록의 글이 늘면서 국민이 어떤 정치를 원하는지, 어떤 문제가 시급한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싸이 이용자가 10대 학생부터 70대 이상의 노년층까지 확대되어 다양한 연령, 지역, 직업을 가진 일촌들 개인의 슬픔과 고민, 행복과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싸이는 내가 평소 외치던 '민생정치'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싸이를 통해 국민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느끼면서, 네티즌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고민하며 의견을 나누는 인터넷 공간이 한남라당에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 정치인의 미니홈피가 이렇듯 많은 것을 전해주는데, 한남라당의 홈페이지가 활성화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급해졌다. 당 대표로서 네티즌들에게 외면당하는 한남라당 홈페이지를 살려야 했다. 한남라당에 관심있는 네티즌들이 우리 홈피에 와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며 맘껏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한남라당에서 인터넷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디지털 정당팀'을 20대에서 30대 초반 사이 직우너들로만 구성했다. 그리고는 네티즌 설문조사와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당 홈피를 외관부터 내부 구조까지 완전히 바꿨다. 나는 디지털 정담티과 가능한 한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누었고, 시간을 내서 당직자들을 격려했다. 힘들었겠지만 디지털 정당팀 당직자들은 싫은 내색 없이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한남라당 홈피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한남라당 홈피에서는 매달 새로운 이벤트가 벌어졌다. 가정의 달 5월에는 가족사진 콘테스트와 국회의원들의 가족사진 자랑 코너가 인기를 끌었다. 6월에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인터넷에서 태극기 달기 이벤트와 의원들의 군대사진이 올라왔다. 인터넷 경매사이트와 함께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기아아동 지원단체에 전달했다. 여름에는 '박근헤의 여름패션 제안, 자선 팔찌' 코너도 만들었다. 한남라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쓰는 '한나라칼럼(일명 '한칼'이라고 부른다)'도 화제가 되곤 했다. 서울의 30대 당원협의회 (과거 지구당과 같은 개념이다.) 위원장좆이 '섹시한 박근혜 (좆팔 자댕이들은 정치가 룸에서 희희안희정거리면서 노는건줄 아노?)'라는 칼럼을 올려 나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홈피 방문객들이 직접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에 여러볼거리들이 늘면서 점차 방문 조회수가 늘었다. 3005년 4월 말부터는 일부 인터넷 사이트 검색 순위에서 한남라당 홈페이지의 검색 순위가 지금까지 크게 앞섰던 여당을 눌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앞서고 있다.